Ⅲ. 치유: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
52 이제부터는 치유에 주안점을 둘 것이다. 기적은 수단이고, 속죄는 원리며, 치유는 결과다. “치유의 기적”에 대해 말하는 자는 실재의 두 등급을 부적절하게 결합하는 것이다. 치유는 기적이 아니다. 속죄, 즉 최종적인 기적은 치료법인 반면에, 모든 유형의 치유는 결과다. 속죄가 적용되는 잘못의 종류는 상관없다. 본질적으로 모든 치유는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것을 행하려면, 너 자신이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네가 치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너 자신의 두려움 때문이다.
53 속죄 계획에서 중요한 단계는, 잘못을 모든 수준에서 무효화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바르지 않은 마음 상태”인 병은, 한 수준에서 잘못된 것이 다른 수준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믿음을 항상 수반한다는 의미에서, 수준 혼동의 결과다. 우리는 그동안 계속 기적이 수준 혼동을 교정하는 수단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모든 잘못은 잘못이 일어나는 수준에서 교정되어야 한다. 오로지 마음만이 잘못을 할 수 있다. 몸은 잘못 행동할 수 있지만, 그 이유는 단지 몸이 그른 생각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몸은 창조할 수 없다. 몸이 창조할 수 있다는 믿음은 근본적인 잘못으로서, 모든 육체적인 증상을 낳는다.
54 모든 육체적인 질병은 마법에 대한 믿음을 나타낸다. 마음이 통제할 수 없는 물질에 창조 능력이 있다는 믿음에, 마법을 창조한 왜곡 전체가 의지한다. 이 잘못은 마음이 몸 안에서 그릇되게 창조할 수 있다는 믿음, 혹은 몸이 마음 안에서 그릇되게 창조할 수 있다는 믿음의 두 가지 형식을 취할 수 있다. 창조의 유일한 수준인 마음은 그 자신 너머로는 창조할 수 없음을 이해한다면, 둘 중 어떤 형식의 혼동도 일어날 필요가 없다.
55 오로지 마음만이 창조할 수 있는 이유는 당장 드러나는 것보다 더 명백하다. 영혼은 이미 창조되었다. 몸은 마음을 위한 학습 도구다. 학습 도구는 그 자체로 레슨이 아니다. 학습 도구의 목적은 단지 학습자의 생각하기를 돕는 것이다. 학습 도구를 잘못 사용하여 벌어질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학습을 촉진하지 못하는 것이다. 학습 도구 자체에는 실재적인 학습 오류를 들여올 힘이 없다.
56 제대로 이해한다면, 몸은 양날의 칼로 사용될 수 없는 특성을 속죄와 공유한다. 그 이유는 몸이 어떤 기적이라서가 아니라, 태생적으로 잘못 해석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몸이란 단지 인간이 경험하는 하나의 사실에 불과하다. 몸의 능력은 과대평가될 수 있고, 종종 그렇다. 하지만 몸의 실존을 부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게 하는 자는 특히 가치 없는 형식의 부정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가치 없는”이라는 용어는 간단히 말해, 마음이 없는 것을 부정하여 마음을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마음이 그릇되게 창조할 수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만약 마음의 힘이 가진 이런 불행한 측면을 부정한다면, 마음의 힘 자체도 부정하는 것이다.
57 사람이 몸의 질병에 대한 치료법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물질적인 수단은 단지 마법 원리의 재천명에 불과하다. 잘못의 첫 번째 수준은, 몸이 자신의 병을 창조했다고 믿은 것이다. 두 번째 실족은, 비창조적인 약제로 몸의 병을 치유하려는 시도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아주 빈약한 교정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악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때로 질병은 사람의 마음을 너무 강력하게 장악해서, 그로 하여금 속죄에 접근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런 경우에는 밖에 있는 어떤 것에 치유력이 있다는 믿음을 일시적으로 부여하여, 몸과 마음에 동시에 접근하는 절충적인 접근법을 활용하는 것이 현명할 수도 있다.
58 그 이유는, 두려움을 증가시키는 것은 바른 마음 상태에 있지 않은 자들, 즉 병든 자들에게 가장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두려움으로 약해진 상태에 빠져있다. 그런데 만약 “희석되지 않은” 기적에 부적절하게 노출된다면, 공황 상태에 던져질 수도 있다. 이런 일은 특히 지각이 뒤집혀 있어서 기적을 무서운 것이라고 믿을 때 일어나기 쉽다.
59 속죄의 가치는 그것이 표현되는 방식에 있지 않다. 사실 속죄가 진정으로 사용된다면, [주는 자가 아닌] 받는 자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기적이 최대한의 효능을 발휘하려면 반드시 받는 자가 두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기적을 받는 자가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소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은 정녕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소통임을 의미한다. 기적의 전체 목적은 소통 수준을 올리는 것이지, 부적절한 의미에서 소통에 퇴행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다.
60 기적일꾼이 이 세상에서 자신의 기능을 맡을 준비가 되기 전에, 해방에 대한 두려움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해방이 곧 감금이라는 널리 퍼진 믿음을 자신도 모르게 조장할 수 있다. 이런 그릇된 지각은 해가 몸에만 국한될 수 있다는 저변의 그릇된 믿음에서 발생했다. 이렇게 믿은 이유는, 마음이 자기 자신을 해칠 수 있다는 훨씬 더 큰 두려움 때문이었다. 둘 중 어느 잘못이든 사실상 의미가 없다. 마음의 그릇된 창조물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인식은 교정을 잘못이 있는 수준에 들여오므로, 어떤 형식의 수준 혼동보다 훨씬 더 나은 보호 도구다.
61 오로지 마음만이 창조할 수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여기에는, 교정이 생각 수준에 속한다는 당연한 결론이 내포되어 있다. 전에 한 말을 반복하고 다소 확장해 보자면, 영혼은 이미 완벽하며, 따라서 교정이 필요 없다. 몸은 마음을 위한 학습 도구로 존재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실제로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 학습 도구는 창조되기는 했지만 창조하지는 않으므로, 그 자체로는 잘못을 범할 수 없다. 그렇다면 창조자를 교정하는 것, 즉 창조자가 자신의 그릇된 창조물들을 포기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야말로 창조 능력을 진정으로 의미 있게 적용하는 유일한 방법임이 분명하다.
62 마법은 본질적으로 마음을 무분별하게mindless, 즉 그릇되게 창조적인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물질로 된 약은 일종의 “주문”이다. 치유하기 위해 마음을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는 그런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 그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를 그릇된 창조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그는 그가 유발할 수도 있는 모든 치유를 오해할 공산이 크며, 또한 자기중심성과 두려움은 대개 함께 일어나므로, 치유의 진짜 근원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물질적인 치유 도구에 일시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 왜냐하면 그것을 그 자신의 창조물로 그릇되게 지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가 계속 취약하다고 느끼는 한, 기적을 시도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63 우리는 이미 기적은 기적심의 표현이라고 말했다. 기적심이란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의미에서 단지 바른 마음 상태를 의미할 뿐이다. 바른 마음 상태에 있는 자는 기적일꾼과 기적을 받는 자의 마음을 추어올리지도 깎아내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창조적인 행위로서의 기적은, 기적을 받는 자가 바른 마음 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사실 기적의 목적은 그를 바른 마음 상태로 회복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기적 일꾼이 바른 마음 상태에 있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다른 사람 안에 바른 마음 상태를 재확립해 줄 수 없을 것이다.
64 치유사가 자신의 준비되어 있음에 의존한다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위험에 빠지게 된다. 그가 자신의 준비되어 있음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나의 준비되어 있음에만 한결같은 신뢰를 유지하는 한, 그는 아주 안전하다. 만약 기적을 행하는 너의 성향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항상 너의 바른 마음 상태로 두려움이 침범해 들어와서 문자 그대로 그 상태를 뒤엎어 놓았기 때문이다. 즉, 위아래를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모든 형식의 바르지 않은 마음 상태는 너 스스로 속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결과다. 기적일꾼이 속죄를 받아들이게 되면, 치유될 필요가 있는 자란 단지 바른 마음 상태가 곧 치유임을 깨닫지 못한 자임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65 기적일꾼의 유일한 의무는 스스로 속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마음이 유일하게 창조적인 수준이며, 마음의 잘못은 속죄로 치유된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의미다. 일단 이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의 마음은 오로지 치유할 수만 있다. 그는 자신의 마음에서 모든 파괴적인 잠재력을 부정하고 그것의 순전히 건설적인 힘을 회복시킴으로써, 다른 이의 수준 혼동을 무효화 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기적일꾼이 다른 이에게 주는 메시지는, 그의 마음도 마찬가지로 건설적이며, 그의 그릇된 창조물들은 그를 해칠 수 없다는 진리다. 이렇게 확언함으로써, 기적일꾼은 마음을 마음 자신의 학습 도구(몸)에 대한 과대평가에서 해방하여 학습자로서의 진정한 위치로 회복시킨다.
66 몸은 창조하지 않듯이 배우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학습 도구로서 몸은 그저 학습자를 따를 뿐이지만, 자기 주도권을 잘못 부여받으면 자신이 촉진해야 할 바로 그 배움에 심각한 방해물이 된다. 오로지 마음만이 빛을 비출 수 있다. 영혼은 이미 밝게 비추어져 있으며, 몸은 그 자체로 너무 둔하다. 하지만 마음은, 둔함density은 지성intelligence의 반대라서 독립적으로 배우기가 쉽지 않음을 인식함으로써, 자신의 빛으로 몸을 비춰줄 수 있다. 몸이 비록 그러할지라도, 둔함 너머로 빛을 보는 법을 배운 마음은 쉽사리 몸을 자신에게 동조하게 만들 수 있다.
67 교정적인 배움은 항상, 영안을 깨우고 육안에 대한 믿음에 등을 돌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것은 종종 두려움을 수반하는데,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의 영안이 보게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에 말했듯이, 영안은 잘못을 볼 수 없으며, 잘못 너머로 속죄라는 방어기제만을 바라볼 수 있다. 영안이 보는 것이 극심한 불편함을 일으킨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사람은 그런 불편함이 영안의 지각이 가져오는 최종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잊었다. 제단의 오염을 바라보도록 허락받았을 때, 영안은 즉시 눈을 돌려 속죄도 바라본다.
68 영안이 지각하는 것은 그 무엇도 두려움을 유발할 수 없다. 정확한 영적 자각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은 다만 교정으로 보내질 뿐이다. 불편함은 단지 교정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자각하도록 하기 위해 일어난다. 육안이 보는 것은 교정하지 않으며, 육안이 볼 수 있는 어떤 도구로도 교정될 수 없다. 육체적 시각이 말해주는 것을 믿는 한, 사람의 모든 교정적인 행동은 잘못 인도될 것이다. 진정한 비전이 가려지는 까닭은, 사람이 자신의 더럽혀진 제단을 보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단은 이미 더럽혀졌기에, 그것을 지각하지 않는다면 그의 상태는 곱절로 위험해진다.
69 치유에 대한 두려움은 결국 치유가 필요하다는 명백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저항 때문에 일어난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행한 것을 바라보는 것에 저항한다. 치유는 분리 이후에 사람에게 부여된 능력으로서, 그전에는 전혀 필요 없었다. 시공간 믿음의 모든 측면들처럼, 치유하는 능력도 일시적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속되는 한, 치유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필요하다. 그 이유는 치유가 자비에 기초하기 때문인데, 자비는 다른 사람의 완벽함을, 비록 그 스스로는 그것을 지각할 수 없을지라도, 지각하는 방법이다.
70 사람이 지금 생각할 수 있는 대부분의 고상한 개념은 시간에 의존한다. 자비는 실제로 훨씬 더 강력한 사랑의 아우름을 희미하게 반영한 것인데, 그러한 사랑의 아우름은 사람이 이제껏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식의 자비를 훨씬 넘어선 것이다. 바른 마음 상태를 지금 얻을 수 있다는 제한적인 의미에서, 자비는 바른 마음 상태에 꼭 필요하다. 자비는 다른 사람을 그가 실제로 성취한 것보다 시간상으로 이미 훨씬 더 멀리 나아간 듯이 보는 방법이다. 그 자신의 사고에 결함이 있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속죄를 볼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자비가 전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자비롭게 대한다는 것은, 그가 현재는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앞으로는 더 강해질 수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71 이런 두 가지 지각이 언급된 방식은 그 지각들이 시간에 의존함을 뚜렷이 보여주면서, 자비가 비록 자신보다 더 높은 수준을 향하고 있을지라도 인간의 한계 안에 있음을 아주 분명히 한다. 우리는 앞에서 오로지 계시만이 시간을 초월한다고 말했다. 인간의 진정한 자비의 표현으로서의 기적은 기껏해야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네가 다른 이에게 기적을 베풀 때마다, 두 사람 모두의 고통을 단축하고 있음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순방향은 물론 소급적으로도 작용하는 교정 요인을 전체 기록에 들여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