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방어기제의 재해석
18 네가 어떤 것이든 두려워한다면, 그것이 너를 해칠 힘을 인정하는 것이다. 너의 마음이 있는 곳에 너의 보물도 있음을 기억하라. 이 말은, 너는 네가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는다는 의미다. 두려워할 때 너는 가치를 잘못 매기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이해는 필연적으로 가치를 잘못 매기고, 인간의 모든 생각에 똑같은 힘을 부여함으로써 평화를 파괴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성서에서,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에 대해 말하는 까닭이다. 이런 평화는 사람의 어떤 잘못에 의해서도 흔들릴 수 없다.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나오지 않은 어떤 것이 너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줄 능력을 부정한다.
19 이것이야말로 부정의 적절한 용법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못을 교정하기 위해 사용된다. 그것은 모든 잘못을 빛 속으로 가져오며, 잘못과 어둠은 똑같은 것이므로, 자동적으로 잘못을 교정한다. 진정한 부정은 강력한 보호 도구다. 너는 잘못이 너를 해칠 수 있다는 어떤 믿음도 부정할 수 있으며, 반드시 부정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부정은 은폐 도구가 아닌 교정 도구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자의 “바른 마음”은 이런 부정에 의존한다. 너는 내가 요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행할 수 있다. 나는 너에게 기적을 행하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기적은 자연스럽고 교정적이고 치유하며, 또한 보편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기적이 행할 수 없는 선은 없지만, 의심하는 마음으로는 기적을 행할 수 없다.
20 하느님과 하느님이 창조하신 영혼들은 서로에게 완전히 의존한다. 영혼의 창조는 이미 완벽하게 이루어졌지만, 영혼들에 의한 창조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이 영혼들을 창조하셔서 그들에게 의존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하느님이 그들을 완벽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영혼들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셔서, 그들이 흔들리거나 속을 수 없게 하셨다. 두려워할 때마다 너는 정녕 속은 것이다. 그리고 너의 마음은 영혼을 섬기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영혼에게 일용할 양식을 부정함으로써, 문자 그대로 영혼을 굶주리게 한다. 하느님은 오로지 자비만 베푸신다. 너의 말은 오로지 자비만 반영해야 한다. 자비야말로 네가 받은 것이며, 네가 주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21 정의는 사람에게 자비의 의미를 가르치기 위한 일시적인 방편, 혹은 일종의 시도다. 정의의 판단적인 측면이 발생하는 유일한 이유는, 사람의 마음이 창조하는 것이 정의롭지 않은 것일 때 사람은 정의롭지 않은 것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가 하느님의 뜻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당신의 뜻과 닮게 창조하신 너의 뜻을 그릇된 창조를 위해 사용했기 때문이다. 마음은 오로지 자유롭지 않은 경우에만 그릇되게 창조할 수 있지만, 너는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 갇힌 마음은 정의상 자유롭지 않다. 그 마음은 자신에 의해 사로잡혀 있거나 저지당하고 있다. 따라서 그 마음의 뜻은 제한되어 있고, 자신을 자유로이 주장하지 못한다. 앞에서 언급한 “한 종류다.”의 진정한 의미는 “한 마음, 혹은 한 뜻이다.”이다. 온아들과 아버지의 뜻이 하나일 때, 그들의 완벽한 일치가 곧 천국이다.
22 잘못의 부정은 진리의 강력한 방어기제다. 너는 우리가 그동안 부정의 소극적인 용법에서 적극적인 용법으로 강조점을 옮겨왔음을 알아챌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부정은 순전히 소극적인 도구가 아니다. 부정은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그릇된 창조물을 낳는다. 이것이 바로 정신병자가 부정을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네가 아주 초기에 “부정의 힘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말라.”라고 생각했던 것을 기억하라. 잘못의 부정이 “바른 마음”을 위해 일할 때는 그 마음을 자유롭게 풀어주며, 뜻의 자유를 재확립한다. 뜻은 진정으로 자유로울 때 오로지 진리만을 인식하며, 따라서 그릇되게 창조할 수 없다.
23 거짓된 투사는 적절하게 사용된 부정이 아닌, 거짓된 부정에서 발생한다. 내가 속죄에서 맡은 역할은 참된 투사를 하는 것이다. 나는 너에게 진리에 대한 긍정을 투사할 수 있다. 네가 잘못을 나에게, 혹은 너 자신에게 투사한다면 이 과정을 방해하는 것이다. 투사에 대한 나의 용법은 너 또한 사용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은 그릇된 부정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것은 잘못의 부정을 아주 강력하게 사용한다. 기적일꾼은 내가 사용하는 이런 종류의 부정과 투사를 받아들이고, 부정하고 투사하는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나의 능력과 연합하여, 그것을 다시 자기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얹어주는 자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어느 곳에도 위협이 전혀 없는 상태가 확립된다. 그러면 우리는 진정한 평화의 시간을 위해 함께 일할 수 있다. 그러한 평화는 영원하다.
24 방어기제의 부적절한 사용은 꽤 널리 인식되고 있는 반면에, 적절한 사용은 아직 충분히 이해되지 않았다. 방어기제는 과연 사람 자신에 대한 지각뿐 아니라, 세상에 대한 지각도 창조할 수 있다. 방어기제는 네가 사용하는 목적에 따라 왜곡하거나 교정할 수 있다.
25 부정은 잘못에만 적용되어야 하고, 투사는 진리를 위해서만 남겨두어야 한다. 너는 참되게 받은 대로 참되게 주어야 한다. 황금률은 이러한 근거 위에서만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26 주지화는 마음과 뇌의 혼동에서 비롯되는 용어다. “바른 마음 상태”는 바른 마음을 방어하고, 마음에게 몸에 대한 통제권을 주는 도구다. “주지화”는 분열을 함축하는 반면, “바른 마음 상태”는 치유를 수반한다.
27 철회는 무의미한 것에서 물러나도록 돕는 데 적절하게 활용될 수 있다. 이것은 도망가기 위한 도구가 아닌, 응집하기 위한 도구다. 정녕 한 마음 밖에 없다.
28 해리도 상당히 비슷하다. 너는 너 자신을 반드시 잘못과 분리하거나 해리해야 하지만, 오로지 통합을 방어하기 위해서만 그래야 한다.
29 탈애착은 기본적으로 약한 형식의 해리다.
30 도피는 네가 선택하는 어느 방향으로든 이루어질 수 있지만, 이 개념 자체는 무언가로부터의 도피를 함축한다는 점에 주목하라. 잘못으로부터의 도피는 아주 적절하다.
31 거리두기는 네가 반드시 도피해야 할 대상과 너 자신 사이에 거리를 두는 방법으로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다.
32 퇴행은 너 자신의 본래 상태로 돌아가려는 노력이다. 따라서 퇴행은 덜 성숙한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자리로 회복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
33 승화는 노력의 방향을 다시 숭고한 것으로 돌리는 것이어야 한다.
34 그밖에도 소위 “역동적인” 개념들이 많지만,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방어기제의 오용에 따른 심각한 잘못이다. 그 가운데 다양한 요구 수준들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것은 실제로 수준 혼동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이 절에서 이해해야 할 요점은, 너는 잘못뿐 아니라 진리도 방어할 수 있으며, 사실 훨씬 더 잘 방어할 수 있다는 점이다.
35 목표 자체의 가치가 확고히 세워진 다음에는 수단을 분명히 밝히기가 더 쉬워진다. 누구나 자신의 보물을 방어한다. 그는 그것을 자동적으로 할 것이므로, 그렇게 하라고 말해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진짜 질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너는 무엇을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는가?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가? 네가 일단 이 두 질문을 숙고하여 모든 행동을 할 때 참된 기준으로 적용하는 법을 배우고 나면, 나는 별 어려움 없이 수단을 밝힐 수 있다. 너는 아직 이것을 일관성 있게 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따라서 나는 그동안 네가 요청할 때는 언제든 수단을 사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데 집중해 왔다. 하지만 네가 이 단계를 지나치게 연장하지 않는다면,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올바른 초점은 시간을 헤아릴 수 없이 단축할 것이다.
36 속죄는 파괴적으로 사용될 수 없는 유일한 방어기제다. 모든 이가 결국에는 속죄에 동참해야 하기는 하지만, 속죄는 사람이 만들어 낸 도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속죄 원리는 속죄 자체가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효력을 발하고 있었다. 그 원리는 사랑이었으며, 속죄 자체는 사랑의 행위였다. 분리 이전에는 시공간 믿음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행위가 필요하지 않았다. 속죄라는 방어기제와 속죄의 실현을 위한 필요조건은 분리 이후에야 계획되었다.
37 사람이 건설적으로든 파괴적으로든 사용하려고 선택할 수 있는 그 모든 방어기제는 사람을 구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 점점 더 명백해졌다. 따라서 사람에게는 너무나 뛰어나서 오용될 수 없는 방어기제가 필요하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사람은 비록 그것을 거부할 수는 있어도, 공격 무기로 바꾸려고 선택할 수는 없었다. 반면에 다른 모든 방어기제에는 그렇게 바뀌는 특성이 내재한다. 이와 같이 속죄는 양날의 칼이 아닌 유일한 방어기제가 된다.
38 속죄는 실제로 십자가형이 있기 훨씬 전에 시작되었다. 많은 영혼들이 분리된 자들을 위해 수고했지만, 공격의 힘을 견디지 못해 철수해야 했다. 천사들도 왔지만, 그들의 보호도 충분하지 않았다. 분리된 자들은 평화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분열시켰고, 재통합보다는 더 심한 분열에 몰두했다. 그들이 그들의 마음에 도입한 여러 수준들은 서로 등지게 되었고, 그들은 차이와 구분, 분열과 분산, 그 밖에 스스로 만들어낸 분열을 심화하는 것과 관련된 모든 개념을 확립했다.
39 그들은 바른 마음 상태에 있지 않았기에, 방어기제를 보호로부터 공격으로 돌려서 그야말로 제정신이 아니게 행동했다. 따라서 일단 사용되기만 한다면 오로지 치유를 위해서만 사용될 수 있는, 절대로 분열될 수 없는 도구를 도입하는 것이 아주 중요했다. 속죄는 시공간 믿음에 대한 필요에 제한을 가하고, 궁극적으로는 배움을 완성하기 위해, 시공간 믿음 안에 내장되었다. 속죄는 정녕 마지막 레슨이다. 배움 자체는 배움이 일어나는 교실과 마찬가지로 일시적이다. 이해의 변화가 더 이상 필요 없을 때, 학습 능력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영원히 창조적인 자들은 배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 창조적인 힘을 배움으로 향하게 하는 것은 분리 이후에야 필요했다. 분리 이후에는, 변화된 행위가 필수적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40 사람은 자신의 행위를 개선하는 법을 배울 수 있고, 점점 더 나은 학습자가 되는 법도 배울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을 점점 더 온아들과 밀접하게 일치된 상태로 데려다주지만, 온아들 자체는 완벽한 창조물이며, 완벽함은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배움은 다른 단계들이 존재하는 동안에만 의미가 있다. 사람의 “진화”는 단지 그가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그는 걸음을 앞으로 내디딤으로써 이전의 실족을 교정한다. 이것은 시간의 관점으로는 사실상 이해할 수 없는 과정이다. 그는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41 속죄는 사람이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자신을 과거에서 자유롭게 풀어줄 수 있는 도구다. 속죄는 과거의 잘못을 무효화함으로써, 돌아가는 길로 나아가지 못한 채 왔던 길을 계속 되밟을 필요가 없게 만들어준다. 이런 의미에서 속죄는 시간을 절약하지만, 속죄에 기여하는 기적과 마찬가지로 시간을 폐지하지는 않는다. 속죄의 필요가 있는 한, 시간의 필요도 있다. 그러나 완성된 계획으로서의 속죄는 시간과 독특한 관계가 있다. 속죄가 완성될 때까지 속죄의 다양한 국면이 시간 안에서 진행되겠지만, 속죄 전체는 시간의 끝에 서있다. 그 지점에는 돌아가는 다리가 세워져 있다.
42 속죄는 곧 전적인 헌신이다. 너는 여전히 이것이 상실과 관련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모든 분리된 자들이 어떤 식으로든 범하는 똑같은 실수다. 그들은 공격할 수 없는 방어기제가 최선의 방어임을 믿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온유한 자들이 땅을 물려받을 것이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다. 그들은 자신의 강함으로 인해 문자 그대로 땅을 넘겨받을 것이다. 양방향의 방어기제는 태생적으로 약하다. 그것에는 날이 둘 달려서, 아주 예기치 못하게 자아를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기적에 의하지 않고서는 통제할 수 없다.
43 기적은 속죄라는 방어기제를 내면의 자아를 보호하는 데로 돌려주며, 그러면 내면의 자아는 점점 더 안전해져서 다른 이들을 보호하는 자연스러운 경향을 띠게 된다. 이 내면의 자아는 자신을 한 형제일 뿐만 아니라 한 아들로도 안다. 너도 알다시피, 방어기제가 붕괴될 때는 두려움과 죄의식, 대개 불안과 우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현상이 동반되는 심각한 지남력 장애 기간이 온다. 이 수업은 방어기제가 붕괴되는 것이 아니라 재해석된다는 면에서 다르다. 비록 너는 이 수업도 똑같다고 느낄 수는 있지만 말이다. 방어기제가 재해석될 때는 그 공격을 위한 용도만 사라진다. 이로써 방어기제는 한 방향으로만 사용될 수 있게 되어서, 훨씬 더 강력하고 믿을 만하게 된다. 방어기제는 더 이상 속죄와 대립하지 않고, 속죄에 큰 도움이 된다.
44 속죄는 오로지 네 안에서만 받아들일 수 있다. 너는 이제껏 속죄를 주로 바깥에 있는 것으로 지각했는데, 그로 인해 속죄에 대한 경험이 극히 적었다. 방어기제를 재해석하는 것은 내면의 빛을 방출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분리 이후로 사람은 주로 속죄에 맞서 자신을 방어함으로써 분리를 유지하기 위해 방어기제를 사용했다. 그들 자신은 대체로 이것을 몸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라고 여긴다. 사람의 마음이 열중하고 있는 수많은 몸 판타지들은 몸이 “속죄”를 얻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왜곡된 믿음에서 발생한다.
45 몸을 사원으로 지각하는 것은 이런 종류의 왜곡을 교정하는 데 있어서 첫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그릇된 지각의 일부는 바꾸지만, 전체를 바꾸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것은 몸과 관련된 속죄 개념은 적절하지 않다는 점을 인식한다. 그러나 다음 단계는, 사원이란 전혀 어떤 건물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다. 사원의 진정한 거룩함은 그 둘레로 건물이 세워진 내면의 제단에 있다. 아름다운 교회 건물에 대한 부적절한 강조는, 사람들이 속죄를 두려워하고 제단 자체에 도달하기를 꺼린다는 표시다. 사원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 반면에 영안은 완벽한 시각을 가졌으므로 건물을 전혀 볼 수 없다. 하지만 제단은 아주 뚜렷하게 볼 수 있다.
46 속죄는 완벽한 효율성을 위해 내면의 제단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으며, 그곳에서 분리를 무효화하고 마음의 온전성을 회복해 준다. 분리 이전에는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마음은 두려움 때문에 상처받을 수 없었다. 분리와 두려움은 모두 마음의 그릇된 창조물로서, 무효화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원의 재건”이란 말이 의미하는 바다. 이것은 건물의 재건이 아니라, 속죄를 맞이하기 위해 제단을 연다는 의미다. 이것은 분리를 치유하고, 마음의 모든 분리 오류에 반하는 유일한 방어기제를 사람의 내면에 놓아주며, 그 결과 사람을 완벽하게 상처받을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줄 수 있다.
47 모든 이가 속죄를 받아들이는 것은 시간문제a matter of time일 뿐이다. 사실 시간time과 물질matter은 모두 이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다. 이것은 최종 결정을 피할 수 없다는 말이므로, 자유 의지와 모순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이 아이디어를 면밀하게 검토해 본다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은 그것이 창조된 방법에 의해 어떻게든 제한된다. 자유 의지는 우물쭈물하거나 엄청나게 지체할 수 있지만, 자신의 창조주를 완전히 떠날 수는 없다. 창조주께서는 자유 의지가 그릇되게 창조하는 능력에 제한을 가하셨는데, 그것은 자유 의지의 진정한 목적 때문이었다.
48 의지의 오용은, 극단적인 경우 전혀 견딜 수 없는 상황을 일으킨다. 고통의 역치가 높을 수는 있지만, 한계가 없지는 않다. 결국에는 모든 이가 아주 희미하게라도 더 나은 길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한다. 이런 인식이 더욱 확고하게 자리 잡음에 따라, 그것은 지각의 전환점이 된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영안을 다시 깨우며, 동시에 육안에 대한 투자를 약화한다. 이렇게 두 종류, 즉 두 수준의 지각들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투자는 대개 오랫동안 갈등으로 느껴지고 아주 심각해질 수도 있지만, 그 결과는 하느님만큼이나 확실하다.
49 영안은 문자 그대로 잘못을 볼 수 없으며, 그저 속죄만을 구한다. 육안이 추구하는 모든 해결책은 영안이 보는 앞에서 녹아 사라진다. 내면을 들여다보는 영안은 제단이 더럽혀져서 수리와 보호가 필요함을 즉시 알아차린다. 영안은 바른 방어기제를 완벽하게 알아차리고 있기에, 다른 모든 방어기제를 지나쳐서 잘못 너머로 진리를 본다. 영안은 그 비전의 힘이 아주 강력하므로, 의지를 끌어당겨 자신을 섬기게 하고, 마음의 동의를 강력히 이끌어낸다. 이것은 의지의 참된 권능을 재확립하며, 이제 마음은 점점 더 지연을 참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마음은, 지연이란 단지 불필요한 고통을 증가시키는 방법일 뿐이며, 고통을 참을 필요가 전혀 없음을 점점 더 확실하게 깨닫는다. 이에 따라 고통의 역치가 내려가면서, 한때 아주 사소한 불편으로 여겼던 것에 점점 더 예민해지게 된다.
50 하느님의 아이들은 완벽한 신뢰의 느낌에서 비롯되는 완벽한 편안함을 누릴 권리가 있다. 이것을 얻을 때까지, 그들은 부적절한 수단으로 자신을 보다 편안하게 만들려는 헛된 시도를 하면서 그들 자신과 그들의 진정한 창조적 권능을 소모한다. 그러나 진짜 수단은 이미 주어졌으며, 그들로서는 어떤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자기중심성egocentricity은 대체로 이것을 개인적인 모욕으로 잘못 지각하는데, 이것은 분명 그들 자신에 대한 그릇된 지각에서 일어나는 해석이다. 자기중심성과 영적 교통은 공존할 수 없다. 용어들조차도 서로 모순된다.
51 속죄는 하느님의 제단에 올릴 가치가 있는 유일한 선물이다. 그 이유는, 그 제단 자체의 측량할 수 없는 가치 때문이다. 그 제단은 완벽하게 창조되었으며, 완벽함을 받을 전적인 가치가 있다. 하느님은 당신의 영혼들 없이는 정녕 외로우시며, 영혼들도 하느님 없이는 외롭다. 사람들은 세상을 바라볼 때, 분리를 치유하는 수단으로 지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속죄는 그들이 결국에는 성공할 것이라는 굳은 약속이다.
